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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으로 느끼는 첼로 이야기

차 한 잔의 여유

본문

 
하루 일과 중에서 제가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바로 첼로를 연주하는 시간입니다.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악보를 제대로 보기 힘들고 스스로 연주하는 첼로의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기 중에서 연주자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악기인 첼로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오른손으로 잡은 활로 첼로의 줄을 그을 때 느껴지는 진동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렇게 연주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말 행복했지만, 연주활동을 거듭하면서 시청각장애로 인해 한계를 끼게 될 때 아쉬움도 행복한 감정만큼 커지는 것 같아요.
 
음정 조율하기
첼로는 4개의 줄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조리개와 작은 조리개를 통해 음정을 조율합니다. 첼로가 현악기이기 때문에 주변 온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 만큼, 어떤 장소에서든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내서 연습이나 연주를 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절차’가 바로 음정조율입니다. 미세한 음정 하나까지 잘 들을 수 있는 ‘청력’은 그래서 꼭 필요하겠죠. 하지만 저처럼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직접 들으면서 음정조율이 어려운 경우, 스마트폰에 음정조율을 할 때 도움을 주는 어플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어플을 보면서 어느 정도 혼자 음정을 조율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런데 겨울처럼 추운 날씨에 실내와 실외의 온도가 급격히 변하는 날에는 저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해서 저를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의 인생 스승님이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정년 퇴임 전 마지막으로 학교에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로 초청해주셨을 때가 바로 그랬어요. 강의와 첼로 연주도 함께 해서 학생들과 정년 퇴임을 앞둔 스승님께 의미있는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강의와 연주를 준비했어요.
학교에 도착해서 리허설을 위해 케이스를 열고 첼로를 꺼냈는데, 앗! 첼로의 4개 줄 중에서 2개의 줄이 완전히 풀려 있었어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스마트폰의 어플을 켜고 풀린 줄을 감기 시작했어요. 아니 감으려 노력했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풀린 줄을 감으려고 하는데 멀쩡하던 나머지 2개의 줄도 스르르 완전히 풀려 버리는 겁니다. 정말 울고 싶었어요. 그날이 12월이라서 밖에 있다가 난방이 되고 있는 따뜻한 공간으로 들어오니까 예민한 첼로의 줄이 하나둘씩 풀려 버린 겁니다. 
줄이 완전히 풀리지 않고 어느 정도 탱탱한 상태에서는 어플을 보면서 작은 조리개로 혼자 음정조율이 가능한데, 줄이 완전히 풀려버리면 어플을 보고 조율하기 전에 먼저 그 풀린 줄을 탱탱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 과정이 혼자 하기에는 쉽지 않았어요. 적당한 힘을 주어 줄을 안으로 잘 감아 넣어야 되는데, 너무 힘들 주거나 잘못 감기라도 하면 줄 자체가 끊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요. 그렇게 감아서 어느 정도 탱탱한 상태를 만든 후에 어플을 보면서 세밀한 음정조율을 해야 하는데, 제가 아직 거기까지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죠.
결국 그날 강의는 연주없이 진행했어요. 스승님께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강의와 연주가 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강의를 하면서 괜히 울컥하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아무리 연습을 많이 했더라도 실전에서 그것을 백퍼센트 발휘한다는 은 쉬운 일이 아니죠. 저도 열심히 연습했고, 또 줄이 풀리지 않아서 실제로 연주를 했더라도 실수를 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차라리 실전에서 실수를 했더라도 연주 자체를 하는 게 훨씬 좋았을 텐데, 연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강의만 하고 마무리가 되니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어요.
첼로의 줄이 풀려 버리는 바람에 정작 연주를 해보지도 못한 일은 그 뒤로도 몇 번 더 있었요. 그래서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연주를 하는 게 정말 조심스러워지게 되어요. 줄이 완전히 풀려 버렸을 때 혼자서 그 줄을 감을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겨울에 연주 활동을 하기가 많이 두려워 질 정도였죠.
 
 
이런 사부님 없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겨울에는 연주를 자제하려고 했는데, 작년 겨울 결혼식 축가 연주 부탁을 받았어요. 대학생 때 인연을 맺은 교수님이 결혼을 하게 되어 축가 연주를 부탁하셨거든요. 정말 소중한 인연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해오던 교수님이고, 제가 첼로를 배우게 된 걸 아신 뒤 결혼식 축가 연주는 반드시 제가 해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약속했었어요. 그 결혼식이 딱 작년 겨울이었던 겁니다.
약속했던 거라서 하겠다고는 했는데, 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인한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첼로의 줄이 또 풀려버리면 저 때문에 결혼식을 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강의 같은 경우에는 줄이 풀리면 그래도 동영상을 보여주는 방법 등 어떻게든 대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축가 연주는 라이브로 해야 하니까 줄이 풀리면 다 무용지물이 되는 거죠. 
그래서 축가 연주를 위한 레슨을 받으면서 저에게 첼로를 가르쳐 주시는 사부님이 만반의 준비를 해주셨어요. 첼로를 케이스에 넣을 때 그냥 첼로만 넣지 않고 첼로를 담요로 감싸서 따뜻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신 겁니다. 이게 결혼식 당일에도 효과가 있어서 줄만 풀리지 않는다면 만사천리로 연주만 하면 되는데, 솔직히 결혼식 당일까지 너무 불안했어요.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가 부산이라서 서울에서 첼로와 함께 가야 했는데, 뜻밖에도 결혼식에 사부님도 와주셨어요. 사부님도 걱정이 많이 되셨나봐요. 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사부님이 예식장에서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축가 연주를 하러 앞에 나가야 하는 순서를 설명해주시고, 연주할 자리를 확보하는 등 처음부터 세세하게 신경써 주신 덕분에 저는 정말이지 리허설 때부터 아주 편하게 준비할 수 있었어요. 줄이 풀리지 않았던 건 물론이고 첼로의 상태도 너무 괜찮았어요. 
부산에서의 그 결혼식 축가 연주는 지금껏 제 연주 경력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스스로도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동안 열심히 했던 연습을 충분히 실전에서 발휘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부님 앞에서 큰 떨림없이 하던대로 무사히 연주를 해서 너무 뿌듯했지요. 나중에 사부님은 본인이 다 떨렸다고 하셨지만, 정말 그 결혼식 축가 연주의 99.9999%는 사부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사부님께 전합니다.
 
무대를 즐기고 싶지만…
제가 지금까지 수많은 강의와 연주 활동을 해오면서 스스로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 뭔지 아세요? 바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강의의 경우 사람들이 얼마나 제가 하는 말에 집중해서 보고 듣고 있는지 사람들의 표정을 제가 제대로 볼 수가 없죠. 연주의 경우에는 제가 연주하는 곡의 멜로디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멜로디와 동일하게 연주했는지, 음정은 정확하게 짚었는지, 다른 줄을 건드리지 않고 잘 그었는지 등을 듣지 못하니까 알 수가 없죠. 만약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처럼 대중적인 곡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있잖아요. 그것조차도 듣지 못합니다. 즉 제가 하는 강의와 연주의 ‘분위기’가 어떤지 정말 궁금해요.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를 직접 체감하고 싶다고 해도, 시청각장애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활동지원사처럼 강의나 연주에 동행한 사람에게 사람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를 봐뒀다가 나중에 알려달라고 하기도 하고, 강의나 연주 말미에 제가 사람들에게 어땠는지 직접 물어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의와 연주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크게개의치 않으려고 했고, 제가 서 있는 무대 자체를 즐겼어요.
한번은 지방의 시청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주를 한 적이 있었어요. 총 300명의 시민이 참석했는데, 지금까지 제 강의와 연주 경력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리였어요. 그날도 평소처럼 하던대로 준비하고 연주를 진행하는데, 준비했던 곡을 하나씩 연주하고 중간중간 시민들에게 멘트를 남기던 중,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300명의 시민들 중에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없다면, 무대 위의 제 연주를 무려 600개의 눈이 보고 있고 600개의 귀가 듣고 있겠죠? 정말이지 너무너무 궁금해지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또 내가 하는 연주를 듣고 있을까. 내 연주에 얼마나 공감하며 반응을 하고 있을까…. 너무 궁금함에도 그걸 알 수가 없으니까 순간적으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이럴 때 장애를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난 시청각장애인이다
첼로의 줄이 다 풀렸을 때 스스로 감을 수 없어서, 제가 하는 강의와 연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없어서 한동안 울적한 시간을 보냈어요. 첼로의 줄을 혼자 감을 수 있다면 연주에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될 텐데, 강의와 연주에 사람들이 보내는 반응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더욱 그 무대를 즐기며 열정적으로 강의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시청각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하는 강사도 되지 않았을 것 같고, 첼로에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고요. 시청각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비장애인이었다면 아마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그동안 살아온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의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장애인식개선교육을 하게 되었고, 살아가면서 시청각장애로 인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힘들 때마다 첼로를 연주하며 마음과 영혼을 달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니, ‘장애’가 공통분모를 이루고 있네요. 하고싶어하는 일을 이렇게 즐겁고 열정적으로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차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이제 또 언제 강의와 연주의 기회가 생길지 모르지만, 얼른 다시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동안 많은 연습을 통해 풍성해진 진동을 작년 겨울 결혼식 축가 연주에서도 스스로 느꼈듯이, 이젠 연주에 여유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거든요. 물론 아직 첼로를 전공한 사람처럼 ‘전문적인’ 연주까지는 아니지만, 저의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못할거야’라는 생각보다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면 충분히 도전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요. 이 메시지의 산 증인이 바로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함께걸음> 박관찬 기자입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박관찬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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