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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트너'를 기대하며

박기자의 함께걸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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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저의 취미인 첼로를 배우고 왔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레슨을 받는데, 갈 때마다 제가 첼로와 함께 꼭 준비하는 게 있습니다. 편의점에 가서 치토스를 사는 겁니다. 바비큐맛, 매콤한맛 각각 한 봉지씩 사는거죠. 선생님의 아들인 승원이에게 주기 위한 거예요.
 
선생님 댁에 도착하면 승원이가 현관까지 달려나오는데, 저의 손바닥에 “박관찬형 안녕하세요”라고 글을 적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그의 눈은 제 얼굴이 아닌 제가 들고 있는 가방 속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얼른 치토스를 꺼내주면 금세 얼굴이 환해져서 다시 제 손바닥에 글을 적어줍니다. “박관찬형 고맙습니다.”
 
승원이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요즘 저와 첼로 듀엣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원이와의 의사소통도 쉽지 않거니와, 같이 듀엣 연주를 할려면 그, 뭐라고 할까요? ‘음악적인 소통’이라는 것도 필요한데 그것 역시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곡을 연주하는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서로 소통을 하고 자연스럽게 듀엣 연주를 할 수 있을지 저와 선생님은 많은 고민을 하고 시도도 해보았습니다.
 
그 중 한 방법이 레슨을 갈 때마다 승원이가 좋아하는 치토스를 사서 가는 겁니다. 치토스를 주면서 손바닥 필담을 자주 시도한 덕분에, 이젠 충분히 저를 기억하고, 또 저와의 의사소통 방법도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원이는 제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제 손바닥에 글로 잘 적어줍니다. 정말 고맙게도 손바닥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항상 시작은 ‘박관찬형’이더라고요. 그리고 무슨 말을 적을지 제가 이미 다 눈치채고 승원이가 적고 있는 동안 제가 말을 해도, 승원이는 끝까지 자기가 하려는 말을 제 손바닥에 다 적습니다. 정말 책임감도 강하고 기특한 친구죠? 다만, 글자를 좀 큼직큼직하게 적어주면 좋겠는데…. 글씨를 좀 작게 쓰거든요. 그래서 뭐라고 적는지 엄청 집중해서 읽어야 하더라고요.
 
듀엣 연주를 할 때는 둘 다 동시에 연주 시작을 해야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저는 이 부분을 특히 어려워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제 뒤에서 제 등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춰주는 방법으로 연주 시작 신호를 보내주셨는데, 그게 잘 맞춰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승원이를 향해 “시작할게요!”라고 시작 준비를 한 뒤, “하나 둘 셋!”이라고 말하고 연주를 시작합니다. 아직은 조금 미숙하지만 계속 연습연습하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듀엣 연습을 하면서 승원이에게 참 고마움을 느낍니다. 항상 저를 형이라고 불러주고 볼 때마다 반가워해주는 것도 정말 고맙지만, 듀엣 연습을 할 때 승원이의 역할이 정말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승원이의 연주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오직 제가 기억하는 곡의 박자에 맞춰서 연주를 하기 때문에, 결국 듀엣 연주가 완성되려면 승원이가 제 연주를 듣고 거기에 얼마나 잘 맞춰주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승원이와의 연습을 거득할수록 승원이에게 더 정이 들고 앞으로 하게 될 듀엣 연주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애착도 깊어지는 것 같아요. 연주를 잘 하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가 연주를 시도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련의 이러한 과정들이 우리를 더 성장시켜줌은 물론, 우리의 연주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도 뭔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자신감이라고나 할까요? 굳이 ‘시청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의 세계최초 듀엣’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의 끝없는 연습과 언젠가 무대에서 함께하게 될 연주의 순간순간들이 서로를 ‘영혼의 파트너’로 기억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글 읽으시는 분 중에 혹시 승원이와 친해지고 싶으신 분이 있더라도 절대! 치토스는 사면 안됩니다. 치토스는 저만 승원이에게 사주고 싶으니까요. 이건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승원이의 듀엣 연주 많이 응원해주세요.
작성자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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