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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느린학습자시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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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학습자시민회 현판
 
 
느린학습자를 아시나요?
 
나는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적·정신적인 이유로 생활에 제약이 있지만 병리적 기준에 미치지 못해 장애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 이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분된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 경계선에 선 사람들 중에는 경계성 지능인인 일명 ‘느린학습자(slow learner)’도 있다. 지적 능력 저하(IQ 71~84)로 또래에 비해 학업 향상이나 발전 정도가 떨어지는 이들로 지적장애는 아니지만 평균 범주(IQ 85~115)보다는 낮은 경계선의 지능을 가진 이들이다. 지능의 정규 분포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3.59%가 느린학습자로 추정 된다.
 
▲ 느린학습자 분포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느린학습자시민회’(이하 시민회)는 느린학습자가 홀로 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느린학습자, 부모,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설립된 단체다. 2017년 성북에서 시작되어 각 지역에서 혼자 활동하던 부모 커뮤니티, 복지관, 대안학교, 교육복지센터, 연구자들이 모여 느린학습자 의제 확산과 사회 이슈화를 위해 시민회로 뭉치게 되었다.
 
▲ 느린린학습자시민회 창립총회
 
시민회는 현재 느린학습자 인식개선과 권익옹호, 사회통합지원을 위해 활발한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민회에서는 경계선 지능(borderline intellectual functioning)과 그와 유사한 특성으로 사회적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천천히 배우는 그들의 특성에 따라 ‘느린학습자’로 부른다고 한다. 시민회의 송연숙 이사장에게 이들을 느린학습자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경계선 지능인이라고 하면 지능의 관점으로 바라 보게 되잖아요. 저희가 느린학습자라고 한 것은 좀 더 많은,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포괄하고 싶고, 그들이 천천히 배운다는 의미로 느린학습자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학습’에 포커싱 되어 있는 게 아닌, 생활 전반을 천천히 배운다는 것이요.”
 
▲ 느린학습자시민회 2기 이사회
 
 
시민회에서는 느린학습자를 장애로 보기보다는 특별함이 있는 것으로 본다. 단순히 사람을 장애와 비장애로 구분하지 않고 특별함이 있는 사람들과 같이 손잡고 함께 느림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빨리빨리가 느린 성향의 사람들과는 잘 안 맞아요. 특별함이 있는 분들한테는 그 빠름이 굉장히 힘듦으로 다가오잖아요. 우리 느린학습자 친구들은 좀 기다려 주면 되거든요. 근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기다려 주는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모든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은 느리거든요. 그 느림을 좀 존중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나이 들면 느려지잖아요(웃음).”
 
사각지대에 놓인 느린학습자
 
일상생활 전반에서 느린학습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서 적절한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상당수가 외톨이가 되거나 가족의 돌봄으로 살아가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특히 학교에서 느린학습자는 일반 교육에서는 설 곳이 없고 특수교육에서는 방치가 되어 소외되고 있다.
 
▲ 느린학습자 교육 지원체계 개선방안 국회토론회 모습
 
 
“장애, 비장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요. 장애 영역 안에서는 느린학습자 친구들이 죄 지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너무 잘하기 때문에.. 이들 앞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잘하고 있으니, 문제 있다고, 힘들다고,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반대로 비 느린학습자 분들에게는 ‘너네 애들 좀 문제 있다’, ‘수업에 방해된다’고 폄하를 받아요. (…) 특수교육을 받고 싶어도 장애인이 아니면 부모가 직접 돈을 들여서 (특수교육 대상자임을) 증빙 해야하는데,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어려워요. 통합학급에서는 자꾸 뒤처지다 보니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폭력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고요.”
 
느린학습자의 소외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외감과 고립감은 정서적 문제로 이어지고 느린학습자는 점점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간다.
 
“저희 친구들은 생각보다 많이 대학을 가요. 그런데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휴학이나 자퇴를 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졸업이라도 시키고 싶으면 전문대로 보내라고 말씀드려요. 짝 친구 하나만 있어도 그 친구는 대학 캠퍼스 생활이 너무 행복하겠지만, 짝 친구도 본인의 사회생활이 있어서 끝까지 모든 것을 챙겨주진 못 해요. 우리 친구들은 정서적인 고립감을 느끼면 사회적으로 은둔형으로 가게 돼요. 문제가 문제를 낳는 형국 이에요.”
 
성인 느린학습자는 취업이라는 현실에서 또 한 번 좌절을 겪는다. 느린학습자는 장애인에 포함되지 않아 장애인 고용지원 대상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느린학습자에게 더욱 좁은 취업의 문은 느린학습자가 다시금 장애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계기가 된다.
 
“취업을 하려다 보니 장애 등록을 권장할 수밖에 없어요. 느린학습자는 장애인 고용지원 같은 서비스가 없어서 어려움이 있거든요. 저희 청년 중에 장애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40대 친구가 있는데 지금 행정소송 중이에요. 청년들도 20대 때는 장애 등록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30대 후반으로 갈수록 장애 등록하고 싶어해요. 그동안 쓴맛은 다 봤거든요. 해 볼 거 다 해봤는데 결국은 취업이 안 됐고, 그 직장을 하루 만에, 3일 만에, 일주일 만에, 한 달 만에 다 쫓겨나는 상황들을 경험해 보다 보니까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군을 갖고 싶은데, 장애인 일자리라도 하고 싶은데 그거는 장애 등록을 해야지만 가능하니까요.”
 
열매는 맺었으나..
 
지역 커뮤니티에서 시작하여 동북권NPO로, 이제는 시민회로 연대하며 열심히 걸어온 결과 열매를 맺기도 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가 제정되며 지자체 차원의 느린학습자 지원에 대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2020년 관련 조례를 제정한 서울시는 2022년 6월 전국 최초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밈 센터)’를 설립하여 느린학습자의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밈 센터에서는 생애주기별 평생교육과 상담 서비스, 자조 모임, 느린학습자 진단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며, R&D 체계 구축, 사회인식전환을 위한 활동도 진행한다. 또한 국회에서도 경계선 지능인 지원 관련 법안 4건이 발의된 상태이다.
 
“서울시 경계선 지능인 지원 조례가 2020년에 만들어졌는데 2019년도에 동북권NPO의 ‘느린학습자 지원 정책 수립 기초 연구’가 토대가 되어서 지원 조례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지원 조례에 의해 밈 센터가 이렇게 셋업이 될 수 있었죠.” 지역마다 조례가 제정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조례에 당사자성이 내포되는 것이다.
 
▲ 밈 센터 모습
 
 
“의원님들이 당사자 커뮤니티와 함께 조례를 만들어 가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거든요. 현재 경계선 지능인 조례가 56건, 느린학습자 조례가 20건으로 76건의 지역 조례가 있는데 이 중에 당사자성이 포함된 조례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고 한다면 의문이에요.”
 
공간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나 자신만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는 없을까? 공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나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을 포용하지 못 하는 사회에도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고 이들이 연대하여 사회를 두드리다 보면 결국 문이 열리지 않을까?
 
“시민회에는 ‘찬찬지기’라고 당사자 청년들의 모임이 있어요. 2~30대 청년들이 매달 한 번씩 만나는데 회비 5천원씩 내고 나와요. 저희는 장소만 제공하고 규칙이나 운영은 본인들이 스스로 해요. 지금 3년째 운영하다 보니 친구들이 정서적으로 굉장히 많이 안정감을 갖는 거예요. 최근에는 인권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싶어해서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고민하고 있어요.
 
▲ 찬찬지기 자조모임 모습
 
작은 모임들이 늘어나고 이러한 모임들이 뭉치면 더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공간은 언제나 늘 부족하다. 느린학습자가 소외되지 않는 공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서울시에 밈 센터가 생기긴 했지만 이런 밈 센터가 각 지역별로 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온전히 마음 내놓고 모일 수 있는 공간. 시민회와 같은 공간. 아니면 느린학습자 사업을 하는 복지관이나 밈 센터 같은 곳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하나 지역 커뮤니티가 전국적으로 들불 일어나듯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당사자성을 내포한 조례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느린학습자 가족들은 대부분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본인들이 해결하려고 하는데 결론은 개인과 가정이 해결할 수 없거든요. 사회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면 결국은 당사자와 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 전국 느린학습자 부모연대 발대식 모습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월 ‘전국느린학습자 부모연대(이하, 부모연대)’가 경기도의회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부모연대가 전국에서 자리잡고 활동하게 되면 당사자성을 내포한 조례 제·개정과 법안 발의뿐 아니라 교육과 인식개선에도 큰 시너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분짓지 않는 세상이 올 때까지
 
조례가 제정되고 전국 단위 부모연대도 결성되었지만 시민회는 이제 시작이라고 한다. 사회적 인식개선, 당사자와 부모의 인식개선, 당사자 인권옹호활동, 시민사회와의 연대까지. 긴 여정에 나서고 있다.
 
“‘느린학습자에 대한 사회적 배리어를 허무는 것’, ‘느린학습자 정체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당사자와 부모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 ‘당사자를 대변하고 당사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단체가 되는 것’, ‘장애와 비장애 영역과 손 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계속 해야 할 일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비장애든 장애든 느린학습자든 구분 없이 다 같이 함께 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연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연구소에서도)꼭 함께 해주세요.”
 
장애와 비장애 속에서 느린학습자를 다시 구분 짓기 보다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욕구를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진정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닐까?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느린학습자시민회’의 여정을 응원하며 기자도 그 길을 함께 걷고자 한다. 
 
▲ 경계선지능인 지원법 제정 추진연대 모습
작성자배상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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