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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막다른 골목에 구멍내기

여기는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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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가족의 사망소식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마음 한쪽이 참 씁쓸합니다. ‘비극’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민이 담겨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발달장애인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막다른 골목에 서게 만드는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왜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살펴봐야 하는지 먼저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스위스 장애인 자립 환경을 예시로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하려 합니다.
 
 
막다른 골목 1: 인적 자원이 고갈된다.
2021년 출산율 1.53을 찍은 스위스에서는 올해부터 전 국민 연금제도가 적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량 은퇴하고 출산율이 점차 감소하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이름 아래에 연금 개혁안이 뜨거운 감자처럼 회자 되고 있습니다. 은퇴 세대는 연금을 넉넉히 받고자 하고, 젊은 세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며 연금 수급자의 수급액을 줄이고자 합니다.
 
더불어 학교, 병원, 건축, 사회복지 등 사회 전반에 전문인력난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응급이 아니라면 진료 약속을 잡는 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인력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천편일률적인 고용 형태를 벗어나서 다양한 근무 형태를 보장하고 다양한 인력을 보충해야만 합니다. 현지어가 가능한 전문인력을 외국에서 영입하거나, 비전문인력 또는 유사 전문인력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만 합니다. 외국 및 이민자 인력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분야에서는 국내 보유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산업마다 유출되는 인력 수에 맞춰 새롭게 진입하는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근무 시간 비율에 따라 퍼센트로 계산한 파트타임 근무제가 특히 가정을 가진 직장인 사이에서 인기입니다(예: 주 20시간 근무 시 50% 고용). 작은 영토에 적은 인구, 척박한 농지로 시작한 스위스는 인적 자원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그 언제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스위스의 영토는 남한 면적의 1/2, 인구는 남한 인구의 1/5)
 
영토가 작고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사람이 가장 큰 자원이라는 말은 사실 한국의 사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세계 최저 출산율(2021년 0.81)에 인구 감소 국가가 되었습니다. 생산활동을 할 사람들을 계속 발굴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농사철 일손이 부족하면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말만 그러할 뿐, 고양이 손을 빌릴 생각은 없나 봅니다. 장애인, 한부모 가정, 이민자 등 경제활동이 가능하지만, 기회가 많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처에 적절한 교육 환경이 갖춰있지 않거나, 집 앞 출입도 어려운 신체장애인이나, 자녀 양육에 대한 낮은 이해도로 인해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는 한부모 가정이나, 충분한 한국어 학습 과정을 찾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의 학력이나 경력을 활용할 수 없는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학교도 사회도 소수정예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정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 체계를 따라야 하고, 그 체계가 제시하는 틀에서 벗어난 장애인, 한부모 가정, 이민자의 자립은 쉽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 2: 장애인 자립 환경
적은 수의 인적 자원이 국력의 중심인 스위스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각자 경제활동을 통한 개인의 자립입니다. 헌법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 삶은 개인의 몫이며, 그에 필요한 교육만 국가가 담당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한 개인이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업을 찾는 데에 국가가 책임진다는 논리이지요. 그다음은 개인의 몫입니다. 개개인의 자립을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4~5학년부터 시작하는 직업의 날에 가족이나 지인의 직장에서 같이 근무해보고, 만 13~14세에 희망 직업을 적어내고, 만 15세에는 희망 사업장에 근로 희망서를 제출해서 일주일씩 시험 근무해보고, 그중에서 사업주와 직업훈련자 사이에 합이 맞는 곳에서 3~4년간 직업훈련을 받게 됩니다. 산업별 직군별 직업훈련자 보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충분한 인력 보충이 되지 않는 최근 상황 때문에 성인 구직에 대한 지원도 늘고 있습니다. 일정 수준의 현지어가 가능한 이민자에게 학력 또는 경력 인정 과정을 정부에서 지원하거나, 생계 보조 수급자를 위한 직업훈련 및 재취업/이직을 희망하는 성인 대상 보수교육 시스템이 그 예시입니다. 자녀 양육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수교육과 구직 과정을 거치지 않는 성인은 정부에서 생계 보조 수급을 받기 어렵습니다.
 
이는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 학교에서는 장애인 자립을 위해 유치원부터 스스로 생활 습관을 들이도록 돕고 있습니다. 실내화로 갈아 신는 데 10분 이 걸린다고 해도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신발을 갈아 신는 기술을 터득하는 기회를 뺏는 셈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장애아동은 청소년 시기에 주 1회 직접 요리해서 식사하고, 대중교통으로 통학하고, 여가 활동에 참여하는 것 등을 학습하고 일상에서 해내야 합니다. 그래 야만 직업훈련을 시작할 때 사업장에서 이들을 일꾼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립하는 장애인은 혼자 거주하기도 하고, 공동주거 형태로 큰 아파트에 여럿이 거주하기도 하고, 또는 농장에서 거주와 근무를 동시에 하기도 합니다. 의무교육 시스템을 벗어나 성인으로서 재취업이나 직업훈련이 다시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신청할 수 있습니다. 사회보험의 한 종류인 상해 장애연금에서 이 과정을 지원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장애인 교육 및 훈련 과정은 상해 장애연금 외에도 각 지방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는 대개 학급당 6~7명의 학생에 담임 1명, 보조교사 2~3명이 함께 일합니다. 장애아동의 자립 훈련을 위해 기다리고 보조하고 응원하는 순간마다 이러한 인력이 함께해야 합니다. 장애인 학교의 교직원은 대부분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개 학급당 2명의 담임과 3~4명의 보조교사가 상호 동의한 요일에 맞춰 근무합니다. 파트타임 근무라 해도 보수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교직원이 적절한 대우를 받을 때 장애아동도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연한 파트타임 근무 환경은 유럽에서 가장 긴 법정 근로 시간 (주 42.5시간)을 자랑하는 스위스의 특징입니다. 생계가 가능한 정도의 보수가 뒷받침되는 파트타임 근무를 통해 개인의 삶과 노동 시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근로 환경은 가족을 꾸리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 재원을 제공합니다. 또 다른 사회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셈입니다.
 
 
 
 
 
 
막다른 골목 3: 가족과 세금 부담을 어떻게 타계할 것인가?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 본인을 벗어나 가족과 지역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장애인 학교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는 재정적 부담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그만큼 장애아동 이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부모는 직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더해서 장애인 학교를 통해 일상 습관과 직업 훈련을 받은 장애인은 지역사회에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면서 자립할 기회가 되는 동시에, 지방자치단체에는 장기적으로 생계 보조금 지급률을 낮출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막다른 골목 4: 누가 더 도움이 필요한가?
얼마 전 한국의 어느 부모 사이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스위스와 한국의 자녀 양육 환경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큰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한국은 내 아이가 더 잘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하는 반면, 스위스는 내 아이가 뒤처졌을 때 학교에서 추가 교육하고, 그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 사교육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 가족의 비극과 대처 방안에 대한 글을 의뢰받고 자녀 양육 환경의 차이점이 떠올랐습니다. 무한 경쟁의 마라톤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찍부터 아이를 러닝머신에 올려놓고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달리도록 훈련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물론 러닝머신을 이용하는 비용은 온전히 부모의 몫입니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의 아이들은 러닝머신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내 아이만 빨리 달리도록 훈련하고 마라톤에서 순위권 안에 들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순위권 안에 든 아이들이 다음 선수를 고를 때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빠른 선수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훈련장에는 빨리 달릴 수 있는 선수도 필요하지만, 그 선수를 도와주고, 훈련장을 청소하거나 수리하고, 회원들을 관리하는 인력이 다양하게 필요합니다. 다양한 인력이 충분한 보수와 휴가를 받지 못했을 때, 또는 소수의 인력이 너무 많은 관리 업무를 해내야 할 때, 훈련장이나 선수, 회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입니다.
 
 
막다른 골목 5: 가족주의와 권위주의
삶이 막막해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동반자살’이라고들 부릅니다. <이상한 정상 가족>이라 는 책에서 정확히 설명했듯이,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 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 깊숙이 배어 있는 가족주의와 권위주의의 역할이 큽니다. 전통적으로는 성별이나 나이의 높고 낮음에 따라,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더해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권위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가족주의와 권위주의 안에서 각 개인의 특성은 사라지고 집단 별로 권위를 가진 대표의 결정이 집단 구성원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회사에서는 상사, 나라에서는 정치인, 대중매체에도 특정 인기인이 그 권위를 자랑합니다. 동등한 의견 존중의 기회가 없는 구성원들의 운명은 가정폭력, 상사의 갑질, 정치 불신, 세대 간의 갈등, 학교폭력 등의 사회문제로 불거집니다. 장애인 자녀의 교육과 미래는 물론 당장 매일의 생계와 양육 스트레스에 치이는 엄마의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그 비극은 비단 엄마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 해결이 가족 내에 머무르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비극입니다. 개인의 문제 해결이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정부 시책으로 사회 전반에 발전되지 않을 때, 이런 비극은 언제고 다시 찾아옵니다.
 
 
 
▲ 취리히 근교에서의 살인 사건 기사캡처(https://www.blick.ch/ 2016년 6월 26일자)
 
 
스위스에도 유사한 사건이 간혹 발생합니다. 부부의 범법행위와 약물 사용으로 인해 어린 두 자녀가 법적 보호를 받기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나 시설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명절을 맞아 잠시 엄마에게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엄마는 자살에 실패한 경우가 몇 년 전 취리히 근교에서 있었습니다. 정서불안이 심했던 엄마는 이후 한 신문 인터뷰에서 명절이 지나면 다시 아이들과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함께 죽으려 했으나, 정작 본인의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웠다 밝혔습니다. 이는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반자살’이라 칭하지 않고, ‘살인으로 이어진 아동학대’ 또는 ‘가족 살인’이라 칭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관계에서도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모두 폭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 아이들을 죽인 엄마의 정신건강과 판단 능력, 경제력, 가족 상황을 모두 적절히 고려하지 않고 아이들을 엄마에게 잠시 보내도록 한 아동보호 시스템 자체의 허점이 지적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구멍내기: MZ세대의 개인주의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면서 인구 규모가 작은 스위스가 지금과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된 배경에는 비권위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지역사회 연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계급제도가 없이 지역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평화조약을 맺는 형식으로 나라가 확장했기 때문에 개인 한 명 한 명의 의견과 인력, 그리고 지역사회 내 모두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한국은 오랜 역사만큼 계급제도와 침략, 전쟁 등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와는 참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스위스는 한국과 달리 그 작은 나라에서 지역별 법이 상이한 연방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바로 개인주의와 지역사회 연대의 한 모습입니다. 한국이 스위스와 달리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혜택을 사회구성원 전체가 같이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 등 역사 바로 세우기의 노력과 더불어 괄목해야 할 한국 사회의 현상은 바로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입니다. 그들은 본인의 흥미에 따라 움직이고 학교와 직장에서 상급생 또는 상사에게 감히 반대 의견을 제시할 용기가 있습니다. 직원 신상명세서에 가족의 신상명세까지 시시콜콜 적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주류의 패션이 아니더라도 입고 길거리에 나설 용기가 있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구직과는 상관없는 개인의 흥미를 취미로 발전시켜 즐길 용기도 있습니다.
 
일부 서방 국가의 개인주의를 따라 한다며 젊은 세대의 변화에 대해 혀를 끌끌 차는 분들도 사실 적지 않습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적으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을 유발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정작 개인의 안녕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는 무책임한 가족주의 안에서 모든 책임을 떠안는 소수가 되지 않기 위해, 또는 혼자서 뒤처지는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취하는 한국 사회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천편일률의 교육제도에서 순위를 매기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각 개인이 각기 다른 관심사를 향해 교육제도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 여정에 장애인, 한부모 가정, 청소년, 어린 이, 경력 단절 여성, 생계 보조 수급자, 취업준비생 등 한국 사회구성원 모두가 각 개인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을 일상에서 구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글. 황효빈/스위스 사회복지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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